[한경 머니 = 이동찬 기자] 채식주의는 먹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바르는 화장품에도 불고 있는 비건 열풍. 기분 좋은 ‘고기 맛’은 왜 화장품에도 빠졌을까.
고기는 맛있다. 하지만 소나 돼지가 도축되는 장면을 보고 나면 괜스레 미안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원시시대부터 내려온 약육강식의 논리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어느새 육즙이 가득한 고기 앞에 앉는다. 이 모순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은 채식주의자가 된다.
알고 보면, 채식주의에도 종류가 많다. 소나 돼지와 같은 육류만 먹지 않는 이들을 폴로-페스코(pollo-pesco), 닭이나 오리와 같은 가금류까지 포함한 이들을 페스코(pesco)라 하며, 여기에 생선과 조개 등 어패류까지 금지한 이들을 락토-오보(lacto-ovo)라 칭한다. 더 나아가 달걀과 명란 등 난류를 먹지 않는 이들을 락토(lacto), 난류는 먹지만 우유나 치즈 등 유지류를 금하는 이들을 오보(ovo)라 한다.
버섯이나 해조류, 야채와 과일, 견과류만 먹는 이들을 비건(vegan)이라 하며, 채식주의의 거의 마지막 단계라 볼 수 있다. 식물을 동물과 동일하게 보고 강제로 채집하는 행위 없이 오직 열매류만 따먹어야 한다는 프루테리언(fruterian)도 있지만, 이는 채식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너무 극단적이라고 고개를 내두를 정도다.
어찌됐건, 채식주의는 식품뿐만 아니라 화장품까지 그 범위를 넓혀 가고 있다. 바로 ‘비건 화장품’인데, 간략하게 말해서 동물성 원료나 동물 유래 원료를 함유하지 않는 제품을 말한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은 유기농 화장품과 천연 화장품, 비건 화장품의 차이점에 대해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한다. 심지어 유기농 원료를 쓰면 비건 화장품이라 칭할 수 있다고 아는 업체들도 있을 정도라고.
번식력이 좋고 가격이 싼 토끼와 쥐와 같은 설치류들은 화장품 실험에 가장 많이 희생되는 종이다. 크루얼티-프리 제품들을 인증하는 마크에 토끼가 가장 많이 그려진 이유다.
동물 권리를 보호하는 세계적인 동물단체인 PETA(People for the Ethical Treatment of Animals)가 크루얼티-프리 제품에 인증하는 하트 모양의 귀를 가진 토끼(Caring Consumer Bunny) 마크
북미주를 대표하는 동물보호단체 8개가 연합해 만든 CCIC(the Coalition for Consumer Information on Cosmetics)가 크루얼티-프리 제품에 인증하는 리핑 버니(Leaping Bunny) 마크
무엇이 비건 화장품인가
비건 화장품과 유기농 화장품, 천연 화장품, 그리고 동물 학대 및 실험을 거치지 않은 원료만을 함유한 크루얼티-프리(cruelty-free) 화장품의 가장 큰 차이점은 동물성 원료 및 동물 유래 원료의 함유 유무다.
유기농 인증을 받은 원료를 사용한 유기농 화장품, 화학적 성분을 최소화한 천연 화장품은 모두 동물성 원료나 동물 유래 원료를 함유할 수 있지만, 비건 화장품은 전혀 함유하지 않는다. 또한 몇몇 비건 인증기관이 동물실험을 거친 원료를 함유하면 비건 인증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비건과 크루얼티-프리 화장품이 혼동되기는 하지만, 엄격하게 말해서 둘은 다른 개념이다.
여전히 헷갈린다면 ‘꿀’을 생각하면 된다. 화장품에 로열젤리나 프로폴리스 등 꿀과 관련된 성분이 들어가면 유기농 화장품, 천연 화장품, 크루얼티-프리 화장품으로 인증받을 수는 있지만 비건 화장품으로는 허가받지 못한다. 이는 꿀이 벌이라는 동물을 통해 채취한 원료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비건 화장품은 동물 유래 원료를 피하기 위해 화학성분을 함유할 수 있는데 이 때문에 항상 천연 화장품이 될 수 없고, 유기농으로 재배된 원료만을 고집하는 것도 아니기에 꼭 유기농 화장품이라고도 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동물성 원료가 전혀 없지만 동물실험을 거친 화학성분을 함유했다면 비건 화장품은 될 수 있으나 크루얼티-프리 화장품은 될 수 없다.
영국 비건 소사이어티의 비건 인증 마크
이태리 브이라벨의 비건 인증 마크
비건 제품임을 인증받으려면
채식주의와 동물 복지의 역사가 깊은 유럽은 일찍부터 비건 인증을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1944년 창립된 영국의 비건 소사이어티(Vegan Society)는 비건이라는 단어와 개념을 탄생시킨 단체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독보적인 비건 조직이다.
1990년에는 비건 트레이드마크(Vegan Trademark)를 확립해 엄격한 심사를 거친 제품에만 비건 소사이어티의 라벨을 허용, 공신력 있는 국제 비건 마크로 저명하다. 1977년 이탈리아에서 탄생한 브이라벨(V Label)은 ‘비건 인증’으로는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한다. 두 단체 모두 비건 인증에 있어서 국제적인 공신력과 인지도 부분 1, 2위를 다툰다고 봐도 무방하다.
우리나라 화장품의 유럽 진출 파트너이자 비건 소사이어티와 브이라벨의 국내 최초 비건 인증 에이전트인 하우스부띠끄는 국내 기업들의 비건 제품 등록을 돕고 있다. 하우스부띠끄의 비건 브랜드를 담당하는 박희경 매니저는 두 단체의 비건 화장품 심사 기준이 비슷하다고 설명한다. 모두 동물성 원료 및 동물 유래 성분을 일체 사용하면 안 되며, 비건이 아닌 원료와 교차 오염을 방지해야 하고, 유전자 변형 생물을 함유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동물실험을 하지 않아야 한다. 박 매니저는 이 점에서 비건 소사이어티와 브이라벨의 차이점이 있다고 덧붙였다.
“비건 소사이어티는 중국에서 제조 및 판매되거나 수출하는 제품, 수출 예정인 제품 모두 동물실험에 위배되는 제품이라 간주합니다. 중국은 온라인 판매를 제외하고 동물실험을 마친 제품만 판매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브이라벨은 중국으로 수출하는 경우에도 비건 인증을 받을 수 있어요. 비건이라는 개념을 시작한 조직답게 정통성과 엄격함을 중시하는 비건 소사이어티와 달리 브이라벨은 비건 시장의 중국 진출과 소비자들의 폭넓은 선택을 우선시하는 셈이죠.”
한국비건인증원의 비건 인증 마크
우리나라의 인증 기준
국내에도 비건 제품을 인증하는 기관이 있다. 한국비건인증원은 비건 여부를 가리는 인증 절차뿐만 아니라 생산자와 소비자에게 비건 관련 교육을 실시한다. 단순히 동물성 원료가 들어가지 않으면 비건 제품이라 생각하는 기업 관계자들과 비거니즘을 지향하는 소비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각종 박람회에 참여해 비건 인증을 받은 제품들을 홍보하는 한편, 비건 페스타와 대한민국 식품대전, 친환경 유기농 박람회 등에 참여해 비건 식품과 화장품, 생활용품 등을 생산자와 소비자들에게 설명한다.
한국비건인증원의 비건 인증 절차는 큰 틀에서 보면 해외와 차이점이 거의 없다. 하지만 국내는 원료사에서 원료의 제조과정에서도 동물성 물질이 이용되지 않는 것에 대해 확인한 후 인증한다. 한국비건인증원의 공식 인증을 받으려면, 화장품업체는 먼저 전체 원료 리스트와 비건 인증 기준을 이해했고, 동물실험을 실시하지 않으며, 동물 유래 원료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등 전반적인 내용에 대해 서약서를 제출한다.
그 후 인증원은 화장품의 전 원료를 검토하고, 화장품업체를 통해 각 원료사에 원료별로 동물실험을 거치지 않았고, 동물 유래 원료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확인서를 취합 받아 검토한다. 한국비건인증원은 이 절차를 가장 중시한다. 이 확인서는 할랄, 유기농, 그리고 우리에게 광우병으로 알려진 소해면상뇌증(BSE) 관련 확인서로는 대체 불가하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샘플 수령 후 유전자 검사까지 실시해 통과하면 인증이 완료된다.
왜 비건 화장품인가
그렇다면, 비건 화장품은 왜 각광받고 있을까. 비건 화장품은 채식주의의 연장선으로 보는 것이 좋다. 단지 먹는 것뿐만 아니라 화장품, 생활용품 등 일상 전반에서 동물성 원료를 지양하는 ‘비건 라이프스타일’의 일환이라는 말이다.
한국비건인증원은 비건 라이프스타일이 각광받고 있는 이유를 크게 4가지로 보고 있다. 첫째는 동물 복지의 확산이다.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인구가 증가하면서 동물 권리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 동물을 단순히 섭취하고 이용하는 대상이 아닌 삶을 동행하는 친구로 인식하면서 소나 돼지와 같은 가축과 실험용 쥐에 대한 복지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 것.
둘째는 공장식 축산이 일으키는 환경오염에 대한 자각이다. 같은 양의 육류와 곡물, 채소를 생산하는 데 있어 사용되는 토지와 에너지, 물, 그리고 이산화탄소는 육류가 월등하게 높다. 이는 환경 보존과 생태계 보호 등 지속 가능한 소비와도 연관된 것이다.
셋째는 개인의 건강에 대한 인식 증가다. 다이어트는 물론, 과다하게 동물성 지방을 섭취함으로써 발생하는 관련 질환을 예방하기 위함이다. 마지막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발전으로 인한 전 세계적 교류의 증가다. 유럽의 젊은 층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비거니즘 트렌드가 국내에도 빠르게 전파되며 가치가 재창조되고 있다.
박희경 하우스부띠끄 매니저 또한 유럽과 미국 등의 국가에서 비건이 생활 전반에 자리를 잡고 있다고 언급한다. 특히 제품에 사용된 성분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 성분을 꼼꼼하게 살피는 습관이 있다는 것. 비건 인증 마크는 성분을 일일이 확인하는 번거로움을 덜어 주고 안심하고 제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돕는다.
화장품기업들 또한 비건 인증 마크를 획득해 제품의 신뢰도를 높이고 환경과 동물을 생각하는 윤리적 기업이라는 긍정적 이미지를 심어 줄 수 있기에 비건 인증에 대한 니즈가 높다고 박 매니저는 설명한다. “국내도 유럽처럼 생활 전반에 자리 잡은 비건 트렌드를 쫓아가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어요. 미국 시장조사업체인 그랜드뷰 리서치에 다르면 세계 비건 화장품의 시장규모가 2025년에는 208억 달러로 성장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트렌드 변화에 맞춰 비건은 이제 많은 이들에게 선택이 아닌 필수가 돼 가고 있음을 현장에서 느끼고 있어요.”
국내 뷰티 브랜드들의 비건 인증 또한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비건 소사이어티에 국내에서 가장 많은 제품을 등록한 뷰티 브랜드, 보나쥬르를 시작으로 야다와 시오리스와 같은 강소기업들의 브랜드들이 그 뒤를 잇는다. 화장품 원료사인 코스만도 비건 원료 등록을 완료해 눈길을 끌었다. 마스크팩 브랜드인 CNF와 쁘띠페는 국내에서 가장 먼저 브이라벨의 인증 마크를 획득했다. 총 30개의 뷰티 브랜드, 200여 개에 달하는 제품들이 하우스부띠끄를 통해 비건 인증을 완료했으며 아직 심사 중인 케이스가 많고 비건 등록을 희망하는 대기업과 중소기업들의 문의가 꾸준히 늘고 있어 국내 비건 화장품 시장의 규모가 확산될 것이라고 박 매니저는 예측한다.
한국비건인증원을 통해서는 위시컴퍼니에서 전개하는 뷰티 브랜드, 디어 클레어스의 제품 2개가 가장 먼저 비건 인증을 받았다. 이터널 뷰티, 리베코스 등 뷰티 브랜드의 기초제품들뿐만 아니라 유록무역이 수입하는 헤어 브랜드 위버우드의 샴푸와 컨디셔너, 색조 브랜드인 오세르와 제니하우스 코스메틱의 제품들 또한 인증을 완료했다. 총 20여 개 브랜드, 100개의 제품이 한국비건인증원의 공식 인증을 받았고, 현재 100여 개의 제품들이 비건 심사를 진행 중이다.
제주 유기농 유자 추출물을 함유했다. 비건 소사이어티의 인증을 완료했으며 피부 속 수분을 채우고 화사하게 만드는 타임 이즈 러닝 아웃 미스트 100ml 1만8000원, 30ml 8000원 모두 시오리스
왼쪽부터_한국비건인증원에서 가장 먼저 비건 인증을 받았다. 천연 에센셜 오일을 함유해 향긋한풀향과 함께 피부 속 수분을 충전하는 서플 프레퍼레이션 페이셜 토너 180ml 1만2900원 디어 클레어스, 비건 소사이어티의 비건 인증을 완료했으며 티트리 성분이 면도로 인한 피부 자극을 완화하고 미백과 주름 개선 기능성까지 갖춘 퓨어 마일드 맨 올인원 모이스처라이저 120ml 2만7000원 보나쥬르, 독일 브랜드이지만, 유통사인 유록무역에서 한국비건인증원을 통해 비건 인증을 완료했다. 약산성으로 두피에 자극을 가하지 않고 지루성 두피염과 비듬을 완화하는 스칼프케어 샴푸 200ml 2만4000원 위버우드
도움말: 하우스부띠끄· 한국비건인증원
한국경제매거진